봄나물은 보약이다.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돋아나는 까닭이다. 그 맛은 쓰고 달고 맵고 떫어 어느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다. 여기에 간장과 된장, 고추장이 어우러지면 맛은 깊어지고 향은 은은해진다. 저장 음식의 진수, 장아찌로 거듭나는 것이다.
**<월간 헬스조선>에서는 푸드 칼럼니스트 모정소반(母情小盤)과 함께 조상들이 물려준 한식의 절기별 지혜로운 조리 법과 그 대표적인 식재료 기행을 2011년 2월호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박미숙 원장이 운영하는 (사)한국전통음식체험교육원은 ‘최부자집’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경주 최씨 문중 소유의 용산서원에 있다. 용산서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우고 순국한 최진립 장군의 향사를 위해 지은 곳이다. 갖가지 장아찌로 차려낸 밥상, 장아찌를 몇 가지 올려 국 한 가지만 더하면 한상 근사하게 차려낼 수 있다.장아찌는 원래 늦봄이나 여름 밥상에 어울리는 음식이다. 추운 겨울에는 훌훌 넘길 수 있는 뜨끈한 국물 음식이 즐비하고, 불을 쓰는 것도 불편하지 않아 굳이 간이 센 장아찌를 먹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나른하고 맥이 풀려 밥 먹는 일조차 엄두가 안 나고 번거로울 때야말로 짭짤한 장아찌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갓 지어 고슬고슬한 밥 위에 걸쳐 먹어도 좋고, 찬물에 만 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얹어 먹는 맛도 각별하다.
#숙성을 거치며 묵은 맛과 향이 더해지는 장아찌
발효식품이 그렇듯 장아찌 만들기는 녹록지 않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맞춤한 채소며 나물을 손질해 우선 수분을 빼내고, 재료 특성에 따라 고추장.간장.된장 등을 선택해 버무린 다음, 공기가 통하지 않는 곳에 보관한다. 오랜 시간 맛이 들도록 기다리다 보면 원래 재료가 가진 독성이 모두 빠지고 이로운 성분으로 바뀌는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묵은 맛, 묵은 향을 더한 장아찌가 완성된다. 예전 어머니들에게는 재료와 장의 궁합을 맞추는 것쯤 어렵지 않았겠지만, 요즘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담가 먹기보다는 얻어먹거나 사서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처럼 직접 담가 보려고 재료를 준비해도 간장을 부어야 할지, 된장에 박아야 할지 몰라 난처하다. 무엇보다 좋은 장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난제. 예전에는 장아찌용 독이 따로 있게 마련이었다.
된장만 하더라도, 유독 짜고 오래된 된장이 들어 있는 독을 따로 장아찌용으로 썼다. 그 독 안에는 갖가지 장아찌가 구미구미 들어 앉아 있게 마련이었다. 위에 덮어 놓은 된장을 한 켜 걷어내면 가을 김장 무를 꾸덕꾸덕하게 말려 박아둔 무장아찌나 더덕장아찌가 있고, 미리 소금물에 삭힌 콩잎을 베주머니에 넣어 박아둔 된장콩잎장아찌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추장 항아리 역시 마찬가지. 늦봄에 거둬 소금물에 충분히 삭힌 마늘종이나 여름 내 먹다 남은 오이지를 새들새들하게 말려 박아두고 조금씩 꺼내 먹었다.
장아찌 담은 고추장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여러 번 바꿔 주어야 한다. 고추장 바꿔 주는 횟수가 많을수록 장아찌가 쫀득하고 맛있었기에 고추장이 웬만큼 넉넉하지 않고서는 다양한 장아찌를 담글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제 맛 나는 장아찌를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내 손으로 장아찌를 만들어 즐기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터. 경북 경주에서 (사)한국전통음식체험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미숙 원장을 만났다. 맛이 강한 전통 방식의 장아찌 대신 깔끔하고 개운한 장아찌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 북어대가리 육수로 맛과 영양을 더하는 장아찌
“간장장아찌는 섬유질과 수분이 적고 향이 강하지 않은 재료로 만드는 것이 좋아요. 한마디로 순한 성질인 재료지요. 개성이 강하지 않은 재료에 간장물을 부어 장아찌를 만들면 남녀노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으니까요. 셀러리처럼 향이 강하거나 풋내가 많이 나는 재료에는 식초를 조금 넣어서 맛을 잡아주는 것이 좋고요. 열을 가하는 음식에 파와 마늘을 넣으면 맛이 살아나듯, 장아찌에 식초를 조금 넣으면 피클처럼 개운하게 먹을 수 있어요.”
박미숙 원장이 만드는 장아찌는 먼저 간장물에서 삭힌다. 북어대가리 육수를 섞어서 달인 간장이다. 북어대가리 육수는 냄비에 물을 붓고 북어대가리와 고추, 생강, 마늘, 대파, 양파, 무 등을 넣어 30분 정도 팔팔 끓여 식혀서 만든다. 한 김 식힌 다음 다시마를 넣는데 2~4시간 상온에 두면 다시마 특유의 맛 성분이 진하게 우러난다. 멸치육수는 비린 맛이 나지만, 북어를 쓰면 개운하면서 구수하고 시원하면서 깊은 맛이 난다. 장아찌에 쓰는 간장은 아쉽게도 전통 간장이 아닌 진간장. 전통 간장은 끓여서 사용해도 장아찌가 숙성되는 동안 같이 발효되기 때문에 장아찌 맛이 변한다.
사찰에서 많이 만드는 두부장아찌나 버섯장아찌처럼 몸서리쳐질 만큼 짠 장아찌면 모를까 요즘 입맛에 맞게 하려면 진간장 쪽이 무난하다. 원장이 봄에 많이 담그는 간장장아찌는 곤달비와 곰취장아찌다. 곤달비와 곰취는 구별하기 쉽지 않아 같은 나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원래는 다른 나물이다. 곤달비는 곰취보다 잎이 얇고 크기도 좀 작은데, 쓴맛이 덜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곰취는 그에 비해 잎이 크고 쓴맛이 강하다. 맛에는 큰 차이가 없어 같은 방법으로 담가도 괜찮다.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뺀 곰취나 곤달비를 용기에 담고 북어대가리 육수와 간장, 청주, 식초, 설탕, 물엿을 섞어서 팔팔 끓인 다음 부으면 끝. 공기가 통하지 않게 밀봉한 다음, 한 달 보름 정도 삭히면 향기로운 간장장아찌가 된다.
# 훌훌한 된장물과 고추장물을 부어 개운한 맛을 살리는 장아찌
원장은 된장이나 고추장을 사용한 장아찌 역시 무겁지 않은 맛을 내기 위해 간장에 먼저 삭힌다. 전통 방식의 된장장아찌나 고추장장아찌는 재료를 소금에 절였다가 말려 수분을 없애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건조시키면 섬유질만 남아 질깃할 뿐, 아삭한 맛을 살리기가 어렵다. 이럴 때는 한 달 보름 정도 간장에 담가 삭힌, 다음 건져서 된장이나 고추장으로 맛을 살린다. 간장에 절이면 소금으로 과도하게 수분을 빼내는 것과 달리 재료의 질감은 그대로 살리면서 깊은 맛이 배어들게 마련이라 간이 약해도 변질될 염려가 없다.
고추장장아찌는 머위나 씀바귀, 미나리, 재피, 엉게처럼 쓴맛과 향이 강한 재료로 담가야 제 맛을 낸다. 된장장아찌는 주로 섬유질이 많아 억센 재료나 버섯으로 담그는데, 늦은 봄에 나는 곰취도 좋고 늦가을에 구할 수 있는 콩잎.깻잎 등이 적당하다. 특히 첫 서리가 내리고 난 다음에 수확해 얼룩덜룩한 무늬가 남는 단풍깻잎은 된장과 최고의 맛 궁합을 내는 재료다. 장아찌 만드는 재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채소나 나물을 주로 쓰지만 때에 따라서는 해산물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다.
박미숙 원장이 담그는 된장과 고추장 장아찌들은 하나같이 짜지 않고 슴슴하면서도 전통 장아찌 못지않게 깊은 맛이 살아 있다. 몇 년씩 걸리는 전통 방법 대신 몇 달만 삭혀도 충분히 맛이 들게 하기 위해 북어 대가리 육수를 섞은 된장과 고추장을 쓰기 때문이다.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된장장아찌를 만들 때는 된장에 북어대가리 육수, 청주, 물엿을 훌훌하게 섞어 용기에 담은 재료에 부으면 끝. 고추장장아찌 역시 전통 방식대로 독에 묻어 두는 것이 아니라 간장과 고추장, 북어대가리 육수 등을 섞어 만든 국물을 부어 담근다.
“옛날식대로 된장 항아리나 고추장 항아리에 재료를 박아서 만들면 우선 맛이 너무 짜요. 장아찌를 꺼내 보면 묵은 된장이나 고추장이 엉겨 붙어 모양이 깔끔하지 않아 훑어내고 다시 양념을 해서 먹어야 하지만, 훌훌하게 만든 된장물이나 고추장물로 담그면 복잡한 과정 없이 바로 꺼내 먹을 수 있어 편하고, 간이 적당히 배서 짜지 않아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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